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문단 편집) ===== 종교의 관용 ===== 악바르 대제가 후임 [[샤 자한]], [[아우랑제브]] 등의 황제들과 확연히 차별되는 부분이 바로 종교 부문이다. 악바르는 기본적으로 [[수니파]] [[무슬림]]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세속주의]]적인 스승들에게 굉장히 자유로운 종교관을 교육받았으며 죽을 때까지도 여러 종교들을 존중하면서 살았다. 애초에 무굴 제국이 단순한 지역 강국 정도에서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악바르의 이러한 종교 관용 정책 덕택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인도에는 [[무슬림]]들보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힌두교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단순히 힌두교도들을 찍어눌렀다면 제국의 성장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악바르가 좋아하던 구루 나낙, 카비르, 차이타냐 등의 성자들과 페르시아 시인 하페즈 등이 종교의 관용을 외쳤던 인물들이었기에 악바르 역시 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악바르의 재위 초창기에는 이슬람의 다른 종파인 [[시아파]]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시행했다. 시아파를 믿었던 군주의 무덤이 수니파 성인과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군주의 묘를 파묘하도록 지시하기도 했고, 시아파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시아파 신도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흘러 1570년대에 이르자 [[수피즘]] 등 다양한 종교들을 접하고 악바르의 생각이 바뀌었고, 후반기부터는 시아파에게도 더이상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덕분에 무굴 제국에서는 더이상 수니파-시아파 간의 고루한 싸움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고 만일 일어난다 해도 황제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580년에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관용적인 악바르에 반발해 반란이 일어나자 악바르는 이들을 강경진압하고 주요 울레마[* 이슬람의 법학자들을 의미한다.]들을 불러모아 스스로 [[칼리파]]임을 선포하며 전 인도의 무슬림을 아우르는 종교 최고지도자임을 확실히 했다.[* 참고로 당시 무슬림 세계의 공통 칼리파는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였지만, 악바르는 스스로를 인도의 칼리파로 자칭하고 오스만 제국이 인도 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버렸다.] 한편 [[힌두교]]에 대해서도 다른 무슬림 군주들에 비해서는 대단히 부드러운 자세를 견지했다. 악바르는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교도들이 다시 힌두교로 재개종한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보통 이슬람에서 개종을 최악의 부정한 짓으로 취급하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디왈리 축제 등 힌두교의 축제들을 직접 주관하기도 했고 브라만교 사제들이 자신의 몸에 보석 띠를 두르고 부적을 붙이게 하는 등 웬만한 세속주의 군주 못지 않게 자유로운 종교관을 보였다. 몇 백년 동안 무슬림 왕조들에게 탄압받아온 북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악바르를 성인이라고 칭송했고 그를 찬양하는 찬가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후계자인 [[자한기르]]와 [[샤 자한]]도 소 도살을 금하고 오직 [[갠지스 강]]의 물만 마시는 등 악바르의 힌두 관용 정책 일부는 물려받았다.[* 악바르는 심지어 갠지스 강에서 200마일 떨어진 펀자브 지방에 머무를때에도 갠지스 강에서 물을 길어 오도록 해서 그 물만을 마셨다.] [[자이나교]]와도 관련이 많았다. 악바르는 자이나교의 성자가 6개월 동안 단식 수행을 하는 것을 목격하며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그는 그 성자를 파테푸르 시크리의 궁전으로 초대해 직접 자이나교의 교리를 전해듣는 등 자이나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때 악바르는 성자로부터 다양한 교리와 철학들을 전수받으며 문화충격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성자와의 접견 이후 악바르는 육식을 금하는 자이나교를 본받아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동물들의 도살을 금하는 등 친자이나 정책들을 폈다. 자이나교에 대단히 호의적이던 악바르 대제는 팔리타나 등 자이나 성지를 순례할 때 자이나교도들에게 걷어들이던 순례세를 폐지했다. 게다가 궁정에 자이나 교리를 적은 경전을 배치하고 틈틈이 자이나 성자를 초대하는 등 죽을 때까지 자이나교에 막대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특히 [[시크교]] 문헌에 따르면 악바르 대제는 여러 차례 시크교 [[구루]]인 아르준과 만났으며, 그가 통합한 선대 구루들의 가르침을 전해주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특히 구루 아르준이 시크교의 성서인 《그란트 사히브》를 정리, 저술하고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그때 악바르 대제에게 한 통의 보고가 날아왔는데, 바로 시크교의 구루 아르준이 저술하고 있는 문집에 이슬람을 모욕하는 구절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악바르 황제의 북행길에 황제가 성자였던 바이 붓다와 바이 구르다스를 만났는데, 구루 아르준의 저작의 사본을 전해받은 뒤 찬가를 읽고 나서 오히려 매우 흡족해했으며, 오히려 값비싼 옷과 51 모후르 금화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황제의 암묵적인 용인하에 시크교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부와 영향력 또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바르 대제가 죽고 나서 자한기르 황제 대에 이르러 시크교와의 우호관계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자한기르]] 항목 참조.] [[파일:ibadat-khana-sikri.jpg]] 파테푸르 시크리의 '이바닷 카나'. 이렇게 종교의 자유를 좋아했던 악바르는 나중에 자신을 섬기는 종교를 창시하기까지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들을 토론하게 하고 이 토론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악바르는 파테푸르 시크리의 궁궐에 '숭배의 집'이라는 이름의 이바닷 카나를 짓고 여러 종교의 현자들을 불러 영성에 대해 토론하도록 시켰는데, 이 토론은 할때마다 과격해져서 가끔씩 참여자들 간에 고성이 오가거나 욕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파테푸르 시크리에서의 종교 토론은 날이 갈수록 그 주제가 과격해지고 토론의 폭과 내용도 대단히 심오해졌다. 나중에는 심지어 [[쿠란]]의 정당성이나 신의 존재에까지 주제가 닿았는데, 신을 절대불가침으로 여기던 이슬람 정통 신학자들의 눈에는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정통 신학자들은 제발 토론을 멈춰달라고 악바르에게 탄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악바르가 주최한 토론의 본 목적은 여러 종교들이 한 곳에 모여 토론함으로써 통합과 화합할 수 있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감정이 앞서다보니 화합이라는 최종 목적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악바르의 종교에 대한 시야는 이 토론을 통해서 급격히 넓어지게 된다. 그는 이 토론에서 얻은 종교적 교리와 깨달음을 토대로 스스로 새로운 종교 '딘 이 일라히'를 창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슬람, 힌두, 시크, 자이나 등 다양한 종교에서 취할만한 것을 취해서 자신만의 교리를 만든 것이다. 다만 딘 이 일라히를 '종교'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었다. 딘 이 일라히의 내용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자비와 근면을 중시하는 등 거의 [[윤리학]]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악바르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무슬림이었으니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스스로만의 윤리학을 내세웠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라는 의견이 현대 학계의 주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